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지난 금요일 발매한 세 번째 정규 앨범 ‘you seem pretty sad for a girl so in love’의 제작에 돌입하며 세운 목표는 아주 명확했다. 바로 “보라색이 아닌” 앨범을 만드는 것. 첫 두 장의 앨범 커버를 거의 똑같이 수놓았던 그 지긋지긋한 연보라색부터 걷어내는 게 1단계였다. 결과적으로 그 보라색을 하늘색과 베이비 핑크로 희석시킨 것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일단은 미션 클리어라고 쳐주자. 하지만 진짜 험난한 과제는 그다음이었다. 팝스타가 살아남기 거의 불가능해질 정도로 척박해진 현대 음악계의 기후 속에서 ‘진짜로’ 진화해야 한다는, 오늘날 주류 아티스트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숙제 말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우리는 팝 음악이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떠들어댔으니, 척박하다는 내 평가가 꽤 유난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2020년대 초반 팝 씬은 팬데믹의 정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파장을 일으켰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격리 앨범들, 그리고 아티스트 본인보다 노래의 ‘짧은 구간’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틱톡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2024년이 되자 이른바 대문자 M을 다는 ‘역대급 모먼트(Moments)’를 맞이한 팝스타들의 진짜 파도가 밀려왔다. 찰리 XCX는 ‘Brat Summer’를 일으켰고, 뒤늦게 터진 채플 로안의 돌풍은 명곡 “Good Luck, Babe!”로 정점을 찍었으며, 사브리나 카펜터는 피할 수 없는 메가 히트곡 “Espresso”와 앨범 ‘Short n’ Sweet’를 통해 팝 씬의 은유 여왕으로 등극했다. 확고한 미학적 관점을 지닌 이들은 문화적 위상과 비평적 찬사를 모두 거머쥔 음악을 쏟아냈다.
정작 이 팝의 르네상스 시기에 로드리고는 새 앨범 사이클을 돌지 않았기에 그 담론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물론 2021년 데뷔작 ‘Sour’로 핫 100 차트 탑 10에 4곡을 올리고 그중 2곡을 1위에 올리며 팝의 부활에 시동을 건 장본인이긴 하다. 여느 팝스타들처럼 디즈니 채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지만, 그녀는 시작부터 너무나 능수능란한 작사 실력으로 가족 친화적인 아이돌에서 싱어송라이터로 넘어가는 과도기 자체를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하지만 2024년 당시 그녀는 두 번째 앨범 ‘Guts'(2023) 투어를 도는 중이었다. 첫 싱글 “vampire”가 1위로 데뷔하며 2023년 최고의 호평을 받은 앨범 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Sour’ 시절의 가벼운 팝펑크 사운드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또다시 그 놈의 보라색을 재활용한 탓에 어딘가 창작의 한계에 부딪힌 듯한 씁쓸함을 지우기 힘들었다.
게다가 로드리고가 판에 끼어들었든 아니든, 2024년의 팝 르네상스는 지극히 짧게 막을 내렸다. 그 원인은 놀랍게도 음악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사브리나 카펜터의 후속작 ‘Man’s Best Friend’는 전작의 레트로 팝 사운드와 농담조의 가사를 답습했지만 “Espresso” 급의 생명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남성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앨범 커버 아트가 성별 정치학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상한 척하는 도덕적 논쟁을 촉발시켰고, 이 어그로성 담론은 정작 앨범 사운드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한편 채플 로안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진보적 정치관과 최소한의 사생활을 원한다는 입장을 꾸준히 밝혔지만, 신선할 정도로 소탈한 팝스타의 모습으로 이해받기는커녕 기묘할 정도로 오만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찰리 XCX는 또 어떤가. 특정 정치 캠페인에 ‘Brat’을 끌어들이더니 이제는 아예 팝 장르 자체를 버릴 각을 재고 있다.
여성 팝스타를 향한 이러한 악의적인 백래시는 마돈나나 브리트니, 비욘세 시절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장르가 그 어느 때보다 파편화된 지금, 대중의 주의력을 끌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스타들의 수명을 깎아먹는 훨씬 끔찍한 타격감을 주고 있다. 로드리고 역시 데뷔 초부터 조슈아 바셋을 둘러싼 사브리나 카펜터와의 삼각관계 루머(그녀의 히트곡 “drivers license”가 불을 지폈던)에 시달렸고, 자신이 그토록 숭배하던 테일러 스위프트와 작곡권 분쟁이라는 씁쓸한 잡음을 겪어야만 했다.
트렌드와 백래시가 실시간으로 소비되는 팝 씬의 정글에서 잠시 눈을 돌려보자. 아티스트가 맞닥뜨리는 ‘창작의 벽’은 장르를 불문하고 물리적인 한계와 싸우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로드리고가 가십의 피로도를 뚫고 ‘탈보라색’을 외치며 새 음악을 빚어낼 때, 록 씬의 베테랑 밴드 어 퍼펙트 서클(A Perfect Circle) 역시 기나긴 투어의 고단함과 사투를 벌이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최근 8년 만에 첫 영국 투어의 포문을 연 이들은 단독 싱글 ‘Starless’를 깜짝 발매했다. 2024년 프라이머스, 푸시퍼(Puscifer)가 함께 참여했던 ‘Sessanta E.P.P.P.’ 앨범의 수록곡 ‘Kindred’ 이후 선보이는 첫 행보다. 런던 O2 아카데미 브릭스턴에서 2018년 이후 처음으로 영국 및 유럽 팬들을 만나며 새 싱글과 딥컷들을 쏟아낸 이들에게, 팬들의 관심은 당연히 새 정규 앨범 발매 시기에 쏠려 있다.
기타리스트이자 1999년 밴드를 공동 창립한 빌리 하워델은 미니애폴리스의 93X 라디오를 통해 꽤나 현실적이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진행 중인 음악이 더 있습니다. 유연하게 데드라인을 잡고 있기에 정확한 날짜를 던져드릴 순 없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계속 작업하고 있어요.”
문제는 투어라는 물리적 족쇄다. “지금 투어 중인데, 길바닥에서는 뭔가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가 정말 힘듭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예컨대 지금 여섯 번의 쇼를 연달아 뛰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잠을 잤거든요. 새 앨범 작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려면 다음 투어 일정 사이에 이런 날들이 며칠은 더 필요합니다.”
현재 투어에 합류한 나인 인치 네일스의 드러머 조쉬 프리스를 비롯해 픽시스의 파즈 렌찬틴, 스매싱 펌킨스의 제임스 이하, 퀸스 오브 더 스톤 에이지의 트로이 반 리우웬 등 화려한 멤버들이 거쳐간 어 퍼펙트 서클은 2018년 정규 4집 ‘Eat The Elephant'(‘Mer De Noms’, ‘Thirteenth Step’, ‘eMOTIVe’의 뒤를 잇는) 이후 풀렝스 앨범의 명맥이 끊겨 있다. 툴(Tool)과 푸시퍼의 프론트맨이기도 한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의 살인적인 일정표를 생각하면 이들의 더딘 행보도 무리는 아니다. 하워델은 다른 어떤 뮤지션보다 키넌과 함께할 때 더 창의력을 느낀다며 그의 맹렬한 직업윤리를 칭송했다. “그는 제가 아는 사람 중 확고한 비전과 뚝심을 가지고 그것을 집요하게 실행해 내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탑 3 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기차에 일단 시동이 걸리면 무섭게 굴러가는 식이죠. 그럴 땐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올여름 록 워히터, NOS 얼라이브, 록 암 링, 매드 쿨 등 굵직한 페스티벌 무대를 휩쓸고 연말에는 푸시퍼와 조인트 투어로 남미, 호주, 일본까지 돌 예정인 이 중견 밴드의 일정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키넌은 심지어 본인의 와인 회사(Caduceus Cellars)까지 운영하며 세 개의 밴드를 저글링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결국 음악계의 지형도가 어떻게 요동치든, 한 단계 진화하기 위한 아티스트들의 몸부림은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가십과 백래시가 난무하는 팝의 전장에서 한 여성 아티스트가 과거의 색채를 깨부수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투어 버스 안의 베테랑 록커들 역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다음 챕터를 위한 기차의 시동을 걸고 있다. 이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야말로, 생명력이 한없이 짧아진 오늘날의 음악 씬에서 진짜배기 음악이 탄생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