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드 핫 100 톱 10을 뚫어낸 제니, 장르를 허물다
제니가 테임 임팔라(Tame Impala)와 손잡고 내놓은 리믹스곡 ‘Dracula’로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 10위에 꽂혔다. 본인 커리어 최초의 핫 100 톱 10 진입이다. 앞서 브루노 마스와 합을 맞춘 ‘APT.’로 3위를 찍은 로제에 이어, 블랙핑크 멤버 중 두 번째로 톱 10 고지를 밟은 셈이다. 이게 글로벌 음악 씬에서 꽤나 묵직한 의미를 지니는데, 데스티니스 차일드, 피프스 하모니, 고고스, 런어웨이즈에 이어 전 세계 걸그룹 역사상 두 명 이상의 솔로 톱 10 아티스트를 배출한 다섯 번째 팀이 됐기 때문이다.
차트 성적표를 좀 더 뜯어보면 장르를 불문하는 제니의 파급력이 엿보인다. 메인 차트 밖에서도 ‘Dracula’는 빌보드 핫 댄스/일렉트로닉 송 차트와 핫 록 & 얼터너티브 송 차트 정상을 동시에 꿰찼다. 여기에 미국 내 주류 팝 라디오의 선호도를 보여주는 팝 에어플레이 차트 18위, 전체 장르를 아우르는 라디오 송 차트 2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피지컬한 팬덤 화력을 넘어 현지 대중의 귓가까지 완벽하게 파고들었다는 방증이다.
랭킹을 넘어 ‘나’를 각인시키다: 리사의 가 던진 출사표
흥미로운 건 이들의 솔로 행보가 단순히 ‘차트 줄 세우기’라는 결과론적인 목표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각자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뾰족하게 깎아 세상에 던지는 식인데, 이런 기조는 솔로 프로젝트의 뼈대를 세웠던 리사의 첫 싱글 앨범 <라리사(LALISA)> 때부터 아주 직관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리사는 본인의 본명을 타이틀로 내걸며 “나라는 사람 자체, 내 이름이 가진 힘과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못 박았다. 앨범 크레딧에는 테디를 필두로 24, 베커 붐, 알티, 빈스 등 쟁쟁한 프로듀서진이 이름을 올렸는데, 특히 리사가 테디에게 “신곡에 태국 느낌을 꼭 넣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하면서 특유의 타이풍 편곡이 탄생했다. 뮤직비디오에 모국 태국의 전통 춤과 의상을 기막히게 녹여낸 것은 물론이고, 데뷔 후 5년 내내 고수하던 트레이드마크인 풀뱅 앞머리마저 과감히 넘겨버렸다. 팬들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날것의 새로운 모습을 꺼내기 위해 스스로 큰 마음을 먹고 던진 승부수였다.
음악적 스펙트럼 역시 본인의 강점을 영리하게 파고들었다. 타이틀곡 ‘라리사’가 역동적인 리듬과 파워풀한 랩이 빚어내는 폭발적인 힙합이라면, 수록곡 ‘머니(MONEY)’는 중독성 강한 브라스 반복악절과 피아노 사운드를 베이스로 후반부 댄스 브레이크에서 분위기를 완전히 찢어놓는다. 리사 스스로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던 “내 뒷모습만 봐도 알잖아”라는 가사처럼, 본인만이 뿜어낼 수 있는 거침없는 스웨그를 곡 전체에 흩뿌려둔 셈이다.
따로 또 같이, 느슨하지만 견고한 연대
블랙핑크로서 5년 넘게 쌓아온 치열한 활동과 다양한 아티스트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은 멤버들 각자가 자신이 뭘 가장 잘하는지 깨닫게 해 준 확실한 자양분이었다. 솔로 출격 당시 리사는 제니와 로제가 앞서 솔로로 너무 훌륭한 행보를 보여준 것이 자신을 긍정적으로 자극했다고 털어놨다. 무대 위에선 철저히 혼자만의 싸움이지만, 카메라 뒤에선 서로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을 새벽까지 지켜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들이다. 리사가 이 모든 결과물이 결국 ‘블링크’를 위한 것이라 말했던 것도 이런 그룹 전체의 끈끈한 서사가 뒷받침되었기에 나올 수 있던 진심일 테다.
“순위보다는 그저 리사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하고 봐주셨으면 좋겠다”던 당시 리사의 무던한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각자의 정체성에 집중할수록 차트 성적은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공식을 입증하고 있다. 차트의 숫자에 얽매이기보단 새로운 내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쿨한 태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로제에 이은 제니의 빌보드 핫 100 톱 10 진입이라는 역사적 마일스톤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